채식주의자
무의식의 욕망과 해소
25년 새해가 밝았다.
자주가는 도서관에서 조그만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 화제의 책 채식주의자를 발견하고 바로 대출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기념으로 개정판이 출판되어 반듯하고 목재 펄프 냄새를 풍기는 책이였다.
한창 한강 작가의 책이 유명할 때에는 오래된 책들마저 대출예약이 3 ~ 4개는 쌓여 있었는데, 운이 좋았다.
채식주의자의 이야기는 다른 좋은 요약이 많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로만 구성하고자 한다.
대학 철학 수업에서 프로이트에 관한 철학 교양 수업을 받았던 적이 있다.
무의식의 원리에 대해서 가르치는 이 수업은 나에게는 재미있지만, 남들에게는 기피과목이였던 수업이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란 의식속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나타나도 위장되어 나타난다 이야기 하였다.
그는 정신과 의사 또한 겸했었는데, 그 당시 부인들이 히스테리리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꿈 속에서 무의식이 발현되고, 이 무의식 속에서 간질의 원인인 트라우마가 나타난다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환자 자신도 모르는 트라우마를 찾아내 치료하고, 사례를 적어 남겨 큰 족적을 쌓았다.
꿈으로부터 시작하는 히스테리 증상, 채식주의자의 원혜를 보며 난 프로이트와의 기억을 곱씹어봤다.
그러나 왜 식사에 히스테리를 느끼는지, 난 알 수 없다.
꿈 해석을 겨우 대학 교양 수업 하나만 듣고 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혼돈을 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꿈과 히스테리 증상에 관련된 이야기는 내 안의 작가가 말을 걸지 않았다.
이 주제가 작가의 본심이 담겨진 주제라는 느낌은 들지 못했다.
그저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장치로만 느껴졌다.
오히려 꿈을 주제로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작가의 말소리를 들었다.
책 세상 속에서 꿈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다. 원혜 자기 자신 뿐이다.
책 바깥 속에서는 이를 적은 작가 한명 뿐이다.
아무리 말을 하고 설명을 해도, 자신이 느낀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없으며,
자신과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게 고통과 고독 속에서 있는 원혜를 이해해 줄 사람은 없다.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봐줄 사람은 더더욱 없다. 자기 자신마저 속이기에.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무의식 속 욕망을 바로볼 수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소된 욕망은 완전히 비워지지 못하고 영원한 갈증과 고통으로 남게된다.
중편소설 3명의 주인공은 모두 이와 같은 욕망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이 욕망을 해소한 것은 평소 무의식에 어느정도 이끌렸던 형부였다.
새를 찍고 싶을 때 새를 찍으며 예술로 승화시켜 자신의 욕망의 해소를 느껴왔던 그는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잠시나마 갈증을 해소하였다.
하지만 무의식으로 떨어진 욕망이 사회에 부합하는 욕망인 경우는 없다.
그런 욕망이였으면 무의식으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고자 하지만 이도 저도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결국, 나는 이 책이 작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해소하고자
책을 작성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어둡고 찬란한 고통의 표현들을 보면서 느껴진 작가의 고통과
고통을 표현하지 못하는 주인공들, 내용의 설명보다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준 작가의 말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느꼈다.
러시아와 소련에서 힘든 시기마다 걸출한 문학의 별들이 탄생한 것처럼,
흔히들 문학은 고통 속에서 잉태한다고 이야기한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고통을 해소함에 있어서 문학은 좋은 소재라는 반증이기도 한다.
나 또한 고통을 해소하고자 이런 글을 쓰고 있다.
이런 문학들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이로인해 고통이 해소가 되었으면 한다.